세계: 5월 3일의 주요 역사적 사건
- 1791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유럽 최초의 근대 헌법 중 하나인 '5월 3일 헌법'을 채택하였습니다.
- 1947년: 일본에서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이날을 '헌법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 1960년: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이 창설되었습니다.
- 1986년: 인천 5·3 항쟁: 민중의 분노가 터진 날
- 1993년: 유엔이 언론의 자유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을 제정하였습니다.
1. 유럽 최초의 근대 헌법,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5월 3일 헌법
세계적으로 ‘헌법’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헌법이나 프랑스 혁명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헌법을 제정한 국가는 의외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정한 5월 3일 헌법(Constitution of May 3, 1791)은 단순한 법률 문서를 넘어서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고자 했던 국민적 열망과 정치개혁의 결실이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당시 상황은?
18세기 후반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지금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아우르는 대규모 연합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귀족 중심의 자유주의적 정치체제(자유 거부권)와 반복되는 외세 개입으로 인해 국가는 점점 혼란에 빠졌고, 1772년에는 제1차 분할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게 영토 일부를 빼앗기게 됩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폴란드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 가운데 5월 3일 헌법이 탄생하게 됩니다.
5월 3일 헌법의 주요 내용
5월 3일 헌법은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입헌군주제 도입
국왕의 권한을 일부 제한하고, 입법권을 국회(Sejm)에 부여하여 왕권과 의회의 균형을 시도했습니다. - 세습군주제 채택
선거로 국왕을 선출하던 이전 방식에서 벗어나, 외세 개입을 줄이기 위해 세습군주제로 전환했습니다. - 삼권분립 원칙 반영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분리하여 근대적 국가 체계를 갖추려는 시도가 돋보입니다. - 농민 보호 명문화
농민 계층에 대한 보호 규정을 포함시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계층 간 형평성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 종교의 자유 보장
국교는 가톨릭으로 하되, 다른 종교의 신앙도 일정 부분 허용하는 관용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 헌법 채택의 의의
5월 3일 헌법은 유럽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자, 세계적으로는 미국 헌법(1787년)에 이어 두 번째로 평가받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개혁을 넘어서 국민의 권리를 인정하고, 국가의 구조를 근대화하려는 시도로 높이 평가됩니다.
폴란드 국민들은 이 헌법을 자긍심의 상징으로 여겨 매년 5월 3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운명은…
아쉽게도 이 훌륭한 헌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보수 귀족들의 반발과 외세(러시아)의 간섭으로 인해 1792년에는 헌법 폐지,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제3차 분할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5월 3일 헌법은 이후 폴란드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의 정신적 근거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자유와 국민 주권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2. 🇪🇺 유럽 경제 통합의 또 다른 길, EFTA(유럽 자유 무역 연합)의 탄생 이야기
지금 우리는 유럽 연합(EU)을 대표적인 유럽 경제 공동체로 알고 있지만, 사실 유럽에는 EU 외에도 독자적인 무역 협력체가 존재합니다. 바로 EFTA(에프타), 우리말로는 유럽 자유 무역 연합(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이라고 부릅니다. EFTA는 1960년에 창설되어 지금까지도 활동 중이며, 유럽 경제 통합 역사에서 중요한 축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창설 배경 – “우리는 다른 길을 간다!”
1957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6개국은 로마조약을 통해 유럽 경제 공동체(EEC, EU의 전신)를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EEC의 정치적 통합 지향에 부담을 느낀 몇몇 유럽 국가는 다른 방향의 경제협력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들은 정치적 통합이 아닌 순수한 경제협력, 특히 무역 자유화를 통한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해서 1960년 1월 4일, EFTA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EFTA 창설 당시 회원국
- 영국 (UK)
- 오스트리아
- 덴마크
- 노르웨이
- 포르투갈
- 스웨덴
- 스위스
이 7개국이 모여 스톡홀름에서 EFTA 설립 협정(스톡홀름 협정)에 서명하면서 탄생했습니다. EFTA는 EEC보다 느슨한 형태의 연합으로, 회원국 간 상품에 대한 관세 철폐를 목표로 했습니다.
EFTA의 핵심 목표
- 회원국 간 무역 자유화
- EFTA 내에서는 관세 없이 상품 교역 가능
- 농산물과 서비스는 일부 제외
- 정치적 통합 없이 경제 협력만
- EEC와 달리 공동의 정치기구나 입법권 없음
- 각국의 경제적 자율성 보장
- 내정 간섭 없이 각국의 주권을 존중
3. 언론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 5월 3일 ‘세계 언론 자유의 날’ 이야기
매년 5월 3일, 세계 각국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기념하고, 표현의 자유를 되새기며, 언론인 보호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세계 언론 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입니다. 이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닙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거나 검열이 존재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언론의 독립성과 언론인의 안전을 보장해야 함을 세계적으로 되새기는 날입니다.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991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빈트후크(Windhoek) 선언에서 시작된 목소리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선언문에서 아프리카 언론인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다원적인 언론은 민주주의와 발전에 필수적이다.”
유엔은 이 선언의 의미에 공감하며, 1993년 제48차 유엔 총회에서 매년 5월 3일을 ‘세계 언론 자유의 날’로 공식 지정했습니다.
이 날짜는 빈트후크 선언이 채택된 날을 기념하여 선정되었습니다.
세계 언론 자유의 날, 왜 중요할까?
- 언론인 보호의 필요성
- 매년 수많은 기자들이 전쟁터, 부정부패 고발 현장 등에서 위협을 받습니다.
- 실제로 유네스코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에서 900명 이상의 언론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검열과 통제에 대한 경고
- 일부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뉴스가 정치적으로 왜곡되기도 합니다.
- 이 날은 그런 사회적 현실에 대해 국제적 감시와 연대를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 시민의 알 권리 보장
- 언론이 자유로워야 시민은 투명한 정보를 얻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 결국 건강한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 위에서 자라납니다.
전 세계에서 어떻게 기념하나?
세계 언론 자유의 날에는 다음과 같은 행사들이 열립니다.
- 국제회의 및 포럼: 유네스코는 매년 주제에 맞춰 국제 회의를 개최합니다.
- 기자상 시상식: 용감하게 진실을 보도한 기자에게 시상이 이뤄지며, 희생된 언론인들을 추모하기도 합니다.
- 언론 감시 보고서 발표: ‘국경없는 기자회(RSF)’ 같은 단체는 언론자유지수를 발표하며 각국 상황을 분석합니다.
2024년에는 "언론과 민주주의: 정보의 힘"이라는 주제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되었습니다.
4. 1986년 인천 5·3 항쟁: 민중의 분노가 터진 날
1986년 5월 3일, 인천 시내 한복판에서는 군부독재 정권에 맞선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바로 ‘인천 5·3 항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80년 광주 이후 최대 규모의 도시 항쟁으로 기록되며, 민주화운동의 물줄기를 바꾼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사건의 배경 – ‘호헌 철폐, 독재 타도!’
1980년대 중반,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 있었습니다.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시민들은 침묵 속에 살아야 했고
-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야당(신민당)의 돌풍이 일자, 민심은 급속히 민주화를 향해 기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계승한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제(호헌)’를 고수하겠다고 발표했고, 이에 대한 분노와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5월 3일 인천의 거리에서
민심이 들끓던 1986년 5월 3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중심으로 한 야당, 재야세력, 노동자, 학생 등 1만여 명이 인천 도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 장소: 인천 동구 자유공원, 시민회관 사거리, 동인천역 등
- 구호: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 “군사독재 타도!”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무자비한 진압을 선택합니다.
- 경찰은 최루탄을 수백 발 쏘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고
- 당시 언론은 철저히 침묵하거나 왜곡 보도를 일삼았습니다.
그럼에도 인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시위에 동참하며 저항했고, 시위는 자정을 넘길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인천 5·3 항쟁의 의미
- 광주 이후 최대 규모의 도시 항쟁
- 대규모 시위와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민중이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됩니다.
- 전국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 이 사건 이후 서울, 부산, 대구 등 주요 도시에서도 유사한 대중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 6월 항쟁의 초석
- 1년 뒤 벌어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민주화 요구에 불을 붙인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기록과 평가
안타깝게도 인천 5·3 항쟁은 오랫동안 공식적인 역사에서 조명되지 못한 ‘잊힌 민주항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인천지역 시민단체와 민주인사들에 의해 재조명되었고, 인천시는 매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 2024년에는 인천광역시 주최로 항쟁 3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 ‘5·3 항쟁 기념비’도 인천 자유공원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상으로 과거의 5월 3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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