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인의 눈에 비친 미시시피: 에르난도 데 소토의 미시시피강 발견
사건 개요
1541년 5월 8일, 스페인의 정복자이자 탐험가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는 오늘날의 미국 아칸소주 근처에서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유럽인이 이 강을 공식적으로 최초로 기록한 날로 평가됩니다.

누가, 왜 탐험했을까?
- 에르난도 데 소토는 본래 페루 정복에 참여한 인물로, 남아메리카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뒤 북미 대륙에서도 “엘도라도(황금의 땅)”를 찾아 대규모 탐험대를 이끌고 1539년 플로리다에 상륙했습니다.
- 그의 목표는 북미 내륙 깊숙이 숨겨진 황금과 원주민 제국이었지만, 실제로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끊임없는 원주민 저항 속에서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미시시피강의 의미
- 데 소토가 도달한 미시시피 강은 당시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거대한 내륙 수계였습니다.
- 그는 이 강을 ‘리오 그란데(Grande River)’로 명명하며, 유럽 세계에 미지의 대륙 중심부를 처음 알린 인물이 되었죠.
- 이후 이 강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유럽 강대국들의 북미 식민지 쟁탈전에서 핵심 전략적 자원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
- 데 소토는 1542년, 탐험 도중 질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부하들은 미시시피강에 그의 시신을 수장(물에 가라앉힘)시켰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그가 미시시피강에서 시작해, 결국 그 강에 잠긴 상징적인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역사적 의의
- 미시시피강 발견은 단순한 지리적 기록을 넘어서, 북미 대륙의 내륙에 대한 유럽의 첫 인식이자, 식민주의와 탐험의 확장 기점으로 간주됩니다.
- 또한, 원주민과의 충돌, 자연환경에 대한 유럽인의 오만, 탐욕적 탐험이 부른 실패 등 탐험사에 내재된 문제점들도 함께 되새기게 하는 사례입니다.
2. 미국-멕시코 전쟁의 첫 포화: 1846년 팔로 알토 전투의 시작과 의미
전투 개요
- 일시: 1846년 5월 8일
- 장소: 텍사스 팔로 알토 평원 (현재 미국 텍사스주 브라운즈빌 근처)
- 전투 주체: 미국 육군 vs 멕시코 육군
- 미국 지휘관: 제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후에 제12대 미국 대통령)
- 멕시코 지휘관: 마리아노 아리스타(Mariano Arista)
배경 설명
팔로 알토 전투는 미국과 멕시코 간 영토 분쟁으로 인한 무력 충돌의 시작점입니다.
-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합병했으나,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미국은 리오그란데강(Rio Grande)을 국경선으로 주장했고,
멕시코는 누에시스강(Nueces River)까지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며 충돌이 시작된 것이죠.
이로 인해, 양측 모두 병력을 리오그란데 인근에 배치하며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결국 팔로 알토 평원에서 최초의 본격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전투 경과
- 미국군은 대포의 기동성과 사거리 우위를 앞세워 멕시코군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 특히 플라잉 아틸러리(기동 포병) 부대의 활약은 전투를 미국 측으로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멕시코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며 미국 측의 명백한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역사적 의미
- 미국-멕시코 전쟁의 공식 개전
이 전투는 공식적인 미국-멕시코 전쟁(Battle of the Mexican-American War)의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 미국 제국주의의 첫 발걸음
이후 이어진 전쟁을 통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거대한 서부 영토를 획득합니다. - 제커리 테일러의 정치적 성장
팔로 알토 전투의 승리로 테일러는 전 국민적 인기를 얻으며, 1849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 현대전의 기초 모델
이 전투는 기동 포병의 전략적 가치를 입증하며, 이후 미군 전술 발전에 기초가 됩니다.
그 이후
- 미국은 이후 부에나 비스타 전투, 멕시코시티 점령 등 전쟁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했고,
- 1848년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통해 전쟁을 종결시키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 확장을 달성합니다.
3.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음료의 탄생: 1886년 코카-콜라가 처음 만들어진 날
개요
1886년 5월 8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활동하던 약사 존 스티스 펨버튼(John S. Pemberton)은 자신의 약국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코카-콜라 원액 시럽을 제조합니다. 이 시럽은 원래 두통과 피로 회복을 위한 강장제로 개발되었으며, 당시에는 탄산수에 섞어 의약 음료처럼 판매되었습니다.

코카-콜라는 원래 약이었다?
맞습니다! 초기 코카-콜라는 지금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어요.
- 주요 성분: 코카잎 추출물(코카인 미량 포함), 콜라나무 열매(카페인 성분), 시럽, 향신료
- 효능 홍보: 기분 전환, 피로 회복, 신경 안정 효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코카인은 제거되고, 대신 맛과 브랜드 이미지에 초점을 둔 음료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최초 판매 장소는?
- 판매 시작일: 1886년 5월 8일
- 장소: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제이콥스 약국(Jacob’s Pharmacy)
- 가격: 한 잔에 5센트
- 첫날 판매량: 단 9잔(!)
하지만 그 작은 시작이 곧 전 세계를 휩쓸 브랜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죠.
브랜드화의 성공
펨버튼은 그 후 건강 악화로 인해 지분을 여러 차례 나누어 팔았고, 결국 사업가 아사 캔들러(Asa Candler)가 1890년대 코카-콜라의 상업적 권리를 인수하며 광고 마케팅과 병입 시스템을 도입,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킵니다.
- 1920년대: 병 제품 출시
-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용 공급 → 글로벌 이미지 형성
- 1980년대: 펩시와의 경쟁, 뉴 코크 사태 등 전설적인 마케팅 에피소드 다수
코카-콜라의 현재
- 전 세계 200개국 이상에서 판매
- 하루 평균 19억 잔 이상 소비
- 코카-콜라는 이제 단순한 음료가 아닌 문화, 디자인, 마케팅, 브랜드 전략의 아이콘
4. 스타들의 고향, 파라마운트 픽처스: 1912년 할리우드를 만든 전설의 시작
설립 개요
- 설립일: 1912년 5월 8일
- 초기 명칭: Famous Players Film Company
- 창립자: 아돌프 주커(Adolph Zukor), 제시 라스키(Jesse L. Lasky)
- 현재 본사: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오늘날 가장 오래된 미국의 주요 영화사 중 하나이며, ‘할리우드 시스템’의 원형을 만든 기업으로 평가받습니다.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 아돌프 주커는 “무성 영화 시대에도 드라마와 예술성 있는 영화가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영화 제작사 Famous Players Film Company를 설립했고, 이후 제시 라스키가 운영하던 Lasky Feature Play Company와 합병하면서 파라마운트 픽처스 코퍼레이션이 탄생하게 됩니다. - 그들은 영화를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산업과 예술로 발전시킨 선구자들이었습니다.
파라마운트의 역사적 업적
- 스타 시스템 도입
→ 배우 중심 마케팅! 메리 픽퍼드, 루돌프 발렌티노 등 인기 스타 육성
→ “스타가 브랜드가 된다”는 공식을 할리우드에 정착시켰습니다. - 극장 체인 운영 시스템 도입
→ 영화 제작부터 배급, 상영까지 수직 통합
→ 이후 미국 정부의 반독점법에 걸려 1948년 ‘파라마운트 판결’의 계기가 됨 - 대공황에도 살아남은 기업
→ 다양한 장르(코미디, 뮤지컬, 전쟁영화)로 시장을 넓히며 할리우드 중심으로 성장 - 대표작들
- 《대부》 시리즈 (The Godfather)
-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 《포레스트 검프》, 《미션 임파서블》 등
- 애니메이션 브랜드 니켈로디언, 드림웍스와도 협력
오늘날의 파라마운트
- 현재는 파라마운트 글로벌(Paramount Global)의 핵심 자회사로,
영화뿐만 아니라 TV 콘텐츠, OTT 플랫폼(Paramount+) 등으로 확장 중입니다. -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잡으려는 움직임으로,
기존 스튜디오 중 가장 유연하게 변화에 적응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5. 바다 위에서 만난 전환점: 1942년산호해 해전의 종료와 의미
전투 개요
- 기간: 1942년 5월 4일 ~ 5월 8일
- 장소: 오스트레일리아 북동쪽 산호해(Coral Sea)
- 전투 주체: 미국-호주 연합군 vs 일본 제국 해군
- 결과: 전술적으로는 일본의 우위,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연합군의 승리
전투의 배경
- 일본은 뉴기니 포트모레스비 점령 작전을 통해 남태평양으로 진출하려 했습니다.
-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간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습니다.
-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호주 해군이 급파되면서 산호해에서 양측 함대가 충돌하게 됩니다.
전투의 주요 특징
- 인류 최초의 ‘항공모함 간 전투’
양국 함대는 서로 직접 보지 않고 항공기로 공격만 주고받는 전술을 처음 선보였습니다.
이는 현대 해전의 방식을 바꿔놓은 상징적인 전투였습니다. - 주요 피해
- 일본: 경항모 ‘쇼호’ 격침, 항모 ‘쇼카쿠’ 손상
- 미국: 항모 ‘렉싱턴(Lexington)’ 침몰, 항모 ‘요크타운’ 손상
- 일본은 상륙군을 철수시키며 포트모레스비 점령 작전을 중단합니다.
역사적 의미
- 일본의 첫 남진 저지
이 전투는 일본의 태평양 확장 계획이 처음으로 꺾인 전투입니다.
연합군은 이후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죠. - 미드웨이 해전의 서막
렉싱턴을 잃었지만, 요크타운은 간신히 살아남아 한 달 뒤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
결국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합니다. - 항공모함 중심 전쟁의 본격화
산호해 해전은 전통적인 전함 전투 시대를 끝내고,
항공모함 중심의 해전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6. 인류가 이긴 첫 전염병: 1980년 WHO의 ‘천연두 박멸 선언’
사건 개요
- 날짜: 1980년 5월 8일
- 선언 주체: 세계보건기구(WHO)
- 의미: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의 전 세계적 퇴치(eradication) 성공을 공식 인정한 날
이 선언은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 확인 이후 3년간의 감시 기간을 거친 뒤 이루어진 것입니다.
천연두는 어떤 병이었을까?
- 병원체: Variola virus (바이러스성 전염병)
- 주요 증상: 고열, 두통, 극심한 통증, 몸 전체에 물집성 발진 → 흉터, 실명, 사망 가능성
- 치사율: 약 30%, 생존자도 평생 흉터나 장애를 겪음
- 전염 방식: 호흡기 비말 또는 직접 접촉
천연두는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힌 치명적인 팬데믹 질환이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매년 수십만 명이 사망,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원주민의 대규모 인구 감소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백신의 시작도 천연두였다
- 1796년,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우두 백신 개발
→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백신 개념 - 이후 20세기 중반부터 대규모 예방접종 캠페인이 시작되며 감염률이 급격히 감소
박멸까지의 여정
- 1967년: WHO, ‘전 세계 천연두 퇴치 프로그램(Global Smallpox Eradication Program)’ 출범
- 보건 인력 파견, 백신 배포, 실시간 감시체계 도입
- 1977년: 소말리아의 알리 마오 말린(Ali Maow Maalin) → 마지막 자연 감염자
- 1980년: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천연두 감염 ‘0명’ 확인 → 공식 박멸 선언
역사적 의의
- 세계 최초의 전염병 박멸 사례
→ 의학, 보건, 국제 협력의 상징적인 성공 사례로 남음 - 백신 효과 입증 및 공공의료 모델 확립
→ 이후 홍역, 소아마비 등의 백신 프로그램에 큰 영감 - 감염병 관리의 전환점
→ 질병은 “자연 현상”이 아닌 “관리 가능한 현상”으로 인식 전환
이상으로 과거의 5월 8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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