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오늘

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5일에는 무슨일이?

jh0711 2025. 5. 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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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마지막 날


프랑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의 유럽을 정복하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이자 강력한 제국의 상징으로 군림했지만, 결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출처: 나무위키

 어디서 죽었을까?

  • 장소: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 배경: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1815)에서 패배한 뒤 영국에 의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유럽 각국은 그가 다시 권력을 잡을까 두려워했고, 이전처럼 유럽을 뒤흔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립된 섬으로 보냈습니다.

 나폴레옹의 죽음

  • 날짜: 1821년 5월 5일
  • 나이: 51세
  • 사인: 위암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기록에는 극심한 복통과 체중 감소를 호소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역사학자들은 중독설(비소 중독)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사후의 이야기

  • 처음에는 세인트헬레나에 묻혔지만, 1840년 프랑스로 유해가 반환되어 현재는 파리의 앵발리드(Invalides) 군사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그의 묘는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과 역사 애호가들이 방문하는 명소로 남아 있습니다.

 왜 중요한 인물인가?

나폴레옹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닙니다. 그는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을 통해 현대 법체계의 기초를 마련했고, 관료제, 교육제도, 금융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유럽 전역에 그 흔적을 남긴 진정한 ‘역사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짧은 정리

항목                                              내용
이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망일 1821년 5월 5일
장소 세인트헬레나 섬
나이 51세
사망원인 위암 추정 (혹은 중독설)
유해이동 1840년, 파리 앵발리드로 반환
 

 

2. 멕시코의 자존심, 1862년 푸에블라 전투

 푸에블라 전투란?

1862년 5월 5일, 멕시코군이 푸에블라(Puebla)에서 프랑스 제국의 침략군을 막아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규모로만 본다면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대국 프랑스를 상대로 멕시코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큰 상징성을 지닙니다.

출처: 위키백과


 배경

  • 당시 멕시코는 극심한 재정난에 빠져 외국 채무를 갚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이에 프랑스, 영국, 스페인 3국은 멕시코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연합군을 보냈습니다.
  •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멕시코 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단독으로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프랑스식 제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죠.

 전투의 전개

  • 프랑스군: 약 6,000명, 훈련된 병력과 최신 무기를 갖춘 유럽 강국의 군대
  • 멕시코군: 약 4,000명, 대부분 민병대 수준의 병력
  • 장소: 멕시코시티 동쪽에 위치한 고지대 도시 푸에블라

▶ 멕시코군은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Ignacio Zaragoza)**의 지휘 아래 지형을 활용한 방어전술로 프랑스군을 맞섰습니다.
▶ 특히, 로레토와 과달루페 요새를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며, 집중 공격을 펼쳤고
▶ 프랑스군은 여러 차례 돌파를 시도했으나 고지대에서의 격렬한 방어에 부딪혀 큰 피해를 입고 결국 후퇴하게 됩니다.


 전투의 결과

  • 멕시코의 대승!
  • 프랑스군 사망자 약 500명 이상
  • 멕시코군 사망자는 약 80명 내외

푸에블라 전투는 멕시코의 독립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으며, 매년 5월 5일 '싱코 데 마요(Cinco de Mayo)'라는 이름으로 기념됩니다.  군사적 승리 그 이상으로, 이 승리는 멕시코 국민에게 자존심과 희망을 심어준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왜 이 전투가 중요한가?

  • 멕시코는 전 세계 강대국 중 하나였던 프랑스를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오늘날 이 날은 멕시코에서는 물론, 미국 내 라틴계 커뮤니티에서도 ‘Cinco de Mayo(5월 5일)’로 기념되며 자유와 독립,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날로 기려집니다.
  • 단, 멕시코의 독립기념일(9월 16일)과는 다릅니다. 푸에블라 전투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요약 정리

항목                                  내용
날짜 1862년 5월 5일
장소 멕시코 푸에블라
교전국 멕시코 vs 프랑스
주요 지휘관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멕시코), 샤를 드 로랭 (프랑스)
결과 멕시코의 승리
의의 강대국을 상대로 한 민족적 승리, ‘5월 5일’ 기념일로 발전
 

 

3. 제2차 세계대전 속 기묘한 동맹 – 이터성 전투 (1945년 5월 5일)


전쟁 속에 피어난 의외의 연대

1945년 5월 5일,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이터성(Castle Itter)에서 벌어진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매우 독특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바로 미국군과 독일군이 나란히 힘을 합쳐 나치 친위대와 싸운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출처: 위키백과

 


이터성은 어떤 곳?

이터성은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기슭에 위치한 중세의 성입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이곳을 특별한 감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감옥에는 프랑스의 전직 총리, 장군, 정치인, 저명 인사들이 수감되어 있었죠.

주요 수감자

  • 에두아르 달라디에 (전 프랑스 총리)
  • 폴 레노 (전 프랑스 총리)
  • 샤를 드골의 여동생 마리앙느
  • 장 보랭 (테니스 챔피언)

이처럼 이터성은 프랑스의 상징적 인물들이 갇혀 있던 'VIP 수용소'였습니다.


 전투의 시작: 기묘한 연합군의 탄생

전쟁 말기였던 1945년 5월, 독일군의 지휘체계는 붕괴 직전이었고, 이터성을 관리하던 SS 병력은 도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 틈을 타 수감자들이 반란을 계획하게 되었고, 헬무트 플리커 중령이라는 독일군 인물이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섭니다. 플리커 중령은 나치를 반대하던 독일군 장교로, 자신이 이들을 도우면 처벌받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신념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인근에 주둔 중이던 미국 제103보병사단 소속 잭 리 중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결국 미국군 + 독일군 + 프랑스 수감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 친위대 SS 소속의 나치 병력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전투의 전개

  • 미국군 병사 약 14명
  • 플리커 중령이 이끄는 독일군 병사 약 10명
  • 프랑스 수감자들도 총을 들고 지원

이들은 성 내부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150명 이상의 나치 SS 병력의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 고립된 상황에서 극한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끝내 미국군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투는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전투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

이터성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일하게 독일군과 미국군이 연합하여 싸운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인도주의적 연대와 인간적 신념이 국가와 이념을 초월해 협력할 수 있었던 희귀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후 플리커 중령은 미군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으며, 희생 없이 VIP 수감자들을 구출한 전투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요약 정리

항목                               내용
날짜 1945년 5월 5일
장소 오스트리아 이터성
교전 세력 미국군 + 독일군 + 프랑스 포로 vs 나치 친위대(SS)
특징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미-독 연합전투
결과 연합군 승리, VIP 수감자 전원 생존
의미 전쟁 말기, 인간성과 연대의 상징
 

 

4.1949년, 유럽 평의회(Council of Europe) 설립 – 평화를 향한 첫 걸음


유럽 평의회란?

유럽 평의회(Council of Europe)는 1949년 5월 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설립된 유럽 최초의 범유럽 정치 기구입니다. 전쟁의 참혹한 기억 속에서 다시는 유럽 대륙에 대규모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 인권 보호, 법의 지배를 공동의 가치로 삼는 국가들이 모여 설립한 국제기구입니다.


설립 배경

  •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전역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습니다.
  • 전후 복구와 정치 안정, 인권 보장, 평화 유지를 위한 공동의 대응 필요성 증가
  • 1948년 헤이그 회의(The Hague Congress)를 통해 범유럽 통합 논의 본격화
  • 결국 1949년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10개국이 모여 유럽 평의회를 창설

창립 회원국 (10개국)

  1. 벨기에
  2. 덴마크
  3. 프랑스
  4. 아일랜드
  5. 이탈리아
  6. 룩셈부르크
  7. 네덜란드
  8. 노르웨이
  9. 스웨덴
  10. 영국

 현재는 46개국이 가입한 범유럽 기구로 성장했습니다. (2024년 기준)


주요 목적

  • 인권 보장 : 유럽인권협약(ECHR) 제정 및 유럽인권재판소 운영
  • 법치주의 수호 : 민주적 법치국가 시스템 정착 지원
  • 문화·교육 협력 : 다양한 유럽 국가 간 문화교류 및 교육 표준화
  • 사회 문제 대응 : 사이버범죄, 차별, 언론의 자유 등 공동 대응

유럽인권재판소(ECHR)의 역할

유럽 평의회 산하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럽인권재판소가 있습니다.
개인, 단체, 또는 국가가 인권 침해를 당했을 경우 직접 제소 가능하며,
회원국은 해당 판결에 법적 구속력을 가집니다.


 유럽연합(EU)과는 다른 조직!

많은 분들이 유럽 평의회를 EU(유럽연합)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EU는 경제 통합 중심,
유럽 평의회는 인권과 민주주의 중심의 협의체입니다.

설립 연도 1949년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
주된 목적 인권, 민주주의, 법치 경제 통합, 공동시장 운영
회원국 수 46개국 27개국
본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벨기에 브뤼셀
 

오늘날의 의의

  • 국제 인권 기준 설정의 선두주자
  • 유럽의 민주주의 안정화에 기여
  •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공동 정책 개발 플랫폼

 

5. 1961년 5월 5일 – 앨런 셰퍼드,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성공


앨런 셰퍼드는 누구인가?

앨런 바틀릿 셰퍼드 주니어(Alan Bartlett Shepard Jr.)는 미국 해군 조종사이자 NASA 소속 우주비행사로, 1961년 5월 5일, 미국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인물입니다. 이날의 비행은 단순한 한 명의 비행이 아닌,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 속에서 미국이 거둔 상징적인 성과였습니다.

출처: 나무위키(오른쪽 앨런 셰퍼드)


배경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우주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소련은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을 통해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을 성공시켰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NASA의 머큐리 계획을 통해 유인 우주 비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머큐리 프로젝트와 프리덤 7

  • 프로그램명: 머큐리 계획 (Project Mercury)
  • 우주선명: 프리덤 7 (Freedom 7)
  • 비행 일시: 1961년 5월 5일
  • 총 비행 시간: 약 15분 22초
  • 고도: 약 187.5km (서브오르비탈 비행)
  • 속도: 약 8,262km/h

비록 궤도 진입은 아니었지만, 우주경계인 100km를 넘긴 서브오르비탈 우주비행으로 명실상부한 '우주 비행'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리 가가린과의 비교

  • 한 달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세계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비행을 성공시킴.
  • 셰퍼드의 비행은 그에 이은 인류 두 번째 유인 우주비행이자
    미국의 첫 유인 우주비행 성공 사례입니다.

즉, 셰퍼드의 비행은 미국의 우주 진출 선언이었고, 후속 아폴로 계획의 기반을 마련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국민적 영웅이 된 셰퍼드

  • 우주에서 귀환한 후 셰퍼드는 미국 전역에서 영웅으로 추앙
  •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회동
  • 나중에는 아폴로 14호의 사령관으로 달에 착륙한 유일한 머큐리 7 멤버

역사적 의미

  • 미국의 우주 개발 시대 개막
  • NASA와 머큐리 계획의 대국민 신뢰 확보
  •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 구도 강화
  • 이후의 **달 착륙 계획(아폴로 11)**으로 이어지는 기술적 기반 마련

이후 영향

  • NASA는 머큐리 계획 이후 제미니 → 아폴로 계획으로 발전
  • 1969년에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으로 이어짐
  • 우주는 더 이상 상상의 공간이 아닌 도전의 무대로 자리 잡음

 

 

6. 2000년 – 휴먼 게놈 프로젝트 초안 완성 발표 "인류의 설계도를 해독하다"


휴먼 게놈 프로젝트란?

휴먼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는 인간 유전체의 약 30억 개의 염기서열 해독하고, 그 기능을 이해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 공동 연구입니다.

  • 시작: 1990년
  • 참여 국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등
  • 예상 기간: 15년
  • 목표:
    • 인간의 모든 유전자(게놈) 염기서열 파악
    • 유전자 기능 규명
    • 질병 치료와 예측 기술 개발 기반 마련

2000년 5월 5일 – 초안 완성 발표

이 날, 전 세계 과학계는 놀라운 성과를 접하게 됩니다. 인간 유전체의 90% 이상이 해독된 초안이 완성되었고, 이는 이후 2003년 공식 완성까지 나아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 초안 의미:
    • 모든 염기서열 중 대부분을 파악
    • 유전자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큰 그림 이해
    • 정밀한 분석과 정제는 이후 단계로 진행

이 프로젝트가 왜 중요한가?

  1. 유전병의 원인 규명
    → 특정 유전자 이상이 어떤 질병을 유발하는지 분석 가능
  2. 맞춤형 치료의 시작
    → 개인 유전체 정보에 맞춘 치료법(정밀의료) 기반 마련
  3. 생명과학의 폭발적 성장
    → 바이오, 제약, 유전체 산업 발전 가속화
  4. 윤리적 논의 촉발
    → 유전자 조작, 개인정보 유출 등 새로운 윤리 이슈 등장

 


주요 성과

유전자 식별: 초안을 통해 약 3만 개의 인간 유전자가 식별되었습니다.

질병 연구: 유전자 정보는 유전성 질환의 원인을 밝히고,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 기여했습니다.

개인화 의학: 개인의 유전적 정보를 바탕으로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졌습니다.

생명과학 발전: 유전체 연구는 생명과학 분야 전반에 걸쳐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인간 유전체, 얼마나 방대한가?

  • 염기쌍 수: 약 30억 개
  • 유전자 수: 약 20,000~25,000개
  • DNA 정보량: 약 3GB (텍스트로 환산 시 수십 권의 책 분량)
  • 단 한 사람의 유전체에도 수백만 개의 변이 존재

연구 이후의 변화

  • 2003년: HGP 공식 완성
  • 2020년대: 게놈 해독 비용의 대폭 하락 (과거 수백억 → 현재 수십만 원 수준)
  • 국가 바이오 정책 강화: 정밀의료, 유전자 기반 진단 기술 등 다방면에 적용

인류 전체의 자산

휴먼 게놈 프로젝트는 특정 국가의 것이 아닌, 전 인류를 위한 과학적 자산으로 공공 데이터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희귀질환 연구, 암 치료, 코로나19 대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과거의 5월 5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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