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를 향한 발걸음, 아시아에 첫 발을 내딛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 아나톨리아 상륙

역사적 배경
- 시대: 기원전 4세기
- 출발국: 마케도니아 왕국 (현재의 북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북부)
- 지도자: 알렉산더 3세 (후에 ‘대왕’으로 불림)
- 목적: 동방 최대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정복
이 원정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그리스-페르시아 수백 년 간의 경쟁 구도를 끝내려는 대결이자
알렉산더의 세계 제국 건설의 서막이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상륙
- 장소: 헬레스폰트(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아시아 마이너(소아시아)에 상륙
- 지점: 트로이 근처(고대 트로이 유적이 있는 지역)
- 상징적 행동: 트로이 무덤에서 아킬레우스에게 제물 바침 →
자신을 신화적 영웅에 비견하며 사기 고양
그라니코스 전투 (Battle of the Granicus)
- 발생 시점: 상륙 직후, 기원전 334년 봄
- 적군: 페르시아 지방 총독들과 그리스 용병군
- 결과: 알렉산더의 압도적 승리
→ 페르시아의 첫 방어선 돌파
→ 소아시아 서부 도시들(사르디스, 에페소스 등) 자발적 항복
이 승리는 알렉산더에게 정복 전쟁의 탄력과 신화적 영웅성을 안겨주었고,
그의 군대는 전투력과 리더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됨
전략적 의미
- 페르시아 정복의 교두보 확보
- 소아시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핵심 서부 지역
- 이곳 장악으로 물자와 병력 보급이 수월해짐
-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결속 강화
- 아시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해방 → 동맹국 지원 유도
- 선전 효과 극대화
- ‘젊은 왕’의 성공적인 첫 전투 → 전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름을 떨침
역사적 영향
- 이 원정은 이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전역, 이집트, 인도 북서부까지 정복하는 계기가 됨
-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되는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
- 세계사에서 유럽-아시아 문명의 첫 대대적 접촉 사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의 상륙은
서양의 신화가 동양의 제국을 향해 진군한 순간이었다.
2. “장미로 시작된 피의 연대기”: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

역사적 배경
- 전쟁 명칭: 장미 전쟁 (Wars of the Roses)
- 발생 시기: 1455~1487년
- 전투 장소: 영국 허트퍼드셔 주 세인트 올번스(St Albans)
- 참전 세력:
- ⚪ 요크 가문 (흰 장미)
- 🔴 랭커스터 가문 (붉은 장미)
이 전투는 왕위를 둘러싼 두 귀족 가문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격화된 시작점입니다.
전투 배경
-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6세는 정신 질환으로 통치력이 약화됨
- 대신 통치권을 놓고 요크 공작 리처드(Richard, Duke of York)와
헨리 6세의 측근(특히 소머싯 공작)이 충돌 - 요크 공작은 실권 회복을 위해 무장하고 런던 인근에서 왕군과 대치
전투 경과
- 날짜: 1455년 5월 22일
- 장소: 세인트 올번스 마을 중심지
- 병력 규모: 양측 모두 약 2천~3천 명 정도로 소규모
- 결과: 요크 가문 승리
요크 측이 마을 주거지를 돌파해 기습, 랭커스터 진영의 주요 지휘관들이 사망
- 특히, 왕의 최측근 소머싯 공작 전사
- 헨리 6세는 포로로 잡혔지만 신변은 안전 보장
역사적 의미
- 장미 전쟁의 공식 개전
→ 정쟁이 아닌, 피 흘리는 내전의 시작점 - 귀족 정치 붕괴 조짐
→ 봉건 귀족들의 사병 동원이 일반화되며, 중앙 통제력 약화 - 왕권의 위상 약화
→ 국왕 헨리 6세는 군 통제도 못하고, 포로가 되며 왕권의 무력함 드러남 - 향후 왕위 계승 분쟁 격화
→ 요크 공작의 아들, 에드워드 4세, 훗날 왕위에 오름
→ 결국 **튜더 왕조 탄생(헨리 7세)**까지 이어지는 내전의 서막
흥미로운 사실
- 이 전투는 중세 영국에서 도시 내 전투가 벌어진 드문 사례
- 전투 후에도 요크 공작은 왕권을 빼앗지 않고 섭정 역할을 강화함
- 현대 세인트 올번스에는 기념비와 전적지 표시가 남아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
1455년 세인트 올번스에서의 칼끝은
왕국의 균열을 알린 피의 서막이었다.
3. “총 대신 야망을 든 사나이, 반역의 피고석에 서다”: 1807년, 전 미국 부통령 아론 버 반역죄 기소
사건 개요
- 연도: 1807년
- 인물: 아론 버 (Aaron Burr), 제3대 미국 부통령
- 혐의: 반역죄(Treason) 및 불법 군사활동 계획
- 기소 주체: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
- 재판 결과: 무죄 판결 (같은 해 9월)
이 재판은 헌법상 ‘반역’의 정의와 연방정부 권한을 시험한
미국 초기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법률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아론 버는 누구인가?
- 재임: 1801–1805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부통령)
- 소속: 초기에는 민주공화당, 이후 독자 노선
- 이슈:
- 1800년 대선에서 토머스 제퍼슨과 동률, 하원 투표로 낙선
- 1804년, 알렉산더 해밀턴을 결투로 사망케 하며 정치 생명 위기
- 이후 서부 확장 지역에서 음모를 꾸민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름
어떤 혐의였나?
- 버는 미국 서부와 멕시코 일부 지역을 분리해
자신이 이끄는 독립 국가 건설을 시도한 혐의를 받음 - 그는 스페인과 비밀 접촉을 시도했고, 민병대를 조직하려 했다는 정황이 있었음
- 제퍼슨 대통령은 이를 ‘연방 분열을 노린 중대한 반역’으로 간주
재판 과정
- 장소: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연방법원
- 재판관: 미국 대법원장 존 마셜(John Marshall)
- 검찰: 연방정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직접 관심 가짐)
쟁점은 헌법상 반역죄 요건인
“적과 내통하거나 무력으로 미국에 반기를 든 명백한 행위”가 있었느냐는 것이었음.
최종 판결 및 영향
- 판결 결과: 무죄
- 증거 불충분 (실제 무장 충돌이나 반란이 없었음)
- 마셜 대법원장은 헌법의 엄격 해석을 통해 “의도”만으로는 반역죄 성립이 불가하다고 판단
핵심 영향
- 헌법 해석의 엄격성 강조
- 반역죄는 “명백한 행위가 있어야만 성립”한다는 기준 확립
- 행정부 권력 견제
- 제퍼슨이 사실상 유죄를 몰아가려 했으나, 사법부가 이를 제지
- 정치적 음모와 법률 간의 경계선 사례
- 권력 투쟁과 독립적 사법 판단 사이의 긴장 부각
- 버의 몰락
-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정치 생명 종료, 유럽으로 망명
아론 버의 재판은
정치적 야망이 헌법의 경계를 넘을 수 없음을 보여준 첫 시험대였다.
4. “지구가 가장 크게 흔들린 날”: 1960년 칠레 발디비아 대지진
사건 개요
- 발생 일시: 1960년 5월 22일 오후 3시 11분 (현지시간)
- 발생 위치: 칠레 남부 발디비아(Valdivia) 지역 인근 해안
- 규모: Mw 9.5 (모멘트 규모 기준, 현재까지 관측된 지진 중 세계 최대)
- 진원 깊이: 약 33km
- 지속 시간: 약 10분
- 사망자: 약 1,655명
- 피해자 수: 약 2백만 명 이상 영향
- 재산 피해: 약 5억 5천만 달러 (1960년 당시 기준)
이 지진은 단층의 움직임이 아닌, 판의 경계에서 거대한 해양판이 육지판 밑으로 들어가는 '서브덕션(subduction)' 현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피해 규모 및 파장
주요 피해 지역
- 발디비아, 푸에르토 몬트, 콘셉시온 등 칠레 남부 도시들이 심각한 피해
- 약 40% 이상의 기반시설 파괴, 수십만 명이 무주택자로 전락
지진 후 쓰나미 발생
- 최대 25m 높이의 쓰나미가 태평양 전역에 영향
- 하와이, 일본, 필리핀, 뉴질랜드에도 피해 발생
- 일본에서는 138명 사망
연계된 자연재해
- 지진 후 푸예우에 화산 폭발 (1960년 5월 24일)
- 일부 지역에서는 지반 침하 및 호수 범람 등 이차 재해 발생
과학적·역사적 의의
- 현대 지진학의 전환점
- 모멘트 규모(Mw) 사용이 일반화
- 판 구조론적 해석에 기초한 지구 내부 운동 이해 향상
- 국제 쓰나미 감시 체계의 기폭제
- 이후 태평양 쓰나미 경보 시스템(PTWC) 확대 구축
- 국가 재난 대응 시스템 변화
- 칠레 정부는 건축 기준 강화, 조기 경보 체계 도입 등
→ 이후에도 큰 지진에 대비력 향상된 대표 사례국
- 칠레 정부는 건축 기준 강화, 조기 경보 체계 도입 등
인도주의와 국제 협력
- 국제사회는 칠레에 대한 긴급 인도적 지원
- 유네스코, 미국 적십자, 유엔 기구들이 현장 구조 및 구호 활동
- 칠레는 전 지구적 재난 협력체계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 제공
1960년 발디비아 대지진은 단지 땅을 흔든 것이 아니라,
지진학과 재난 대응의 미래를 흔든 대사건이었다.
5. “두 개의 예멘, 하나의 국기를 품다”: 1990년 예멘 공화국 탄생
배경 요약
1. 북예멘 (예멘 아랍 공화국)
- 수도: 사나(Sana'a)
- 성격: 보수적 이슬람 공화국
- 과거 오스만 제국, 이후 독립 (1918)
- 1962년 공화국 선언 이후 친서방 노선
2. 남예멘 (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
- 수도: 아덴(Aden)
- 성격: 사회주의 마르크스 국가
- 영국 식민지 → 1967년 독립
- 냉전 시기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음
두 국가는 국경 분쟁과 군사 충돌을 반복하며
1972년과 1979년에 두 차례 전쟁을 겪기도 했습니다.
통일의 배경
-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 조짐
→ 남예멘의 정치·경제 기반 약화 - 양국 모두 경제난과 정치 불안 심화
- 1980년대 후반부터 점진적 협의 시작
주요 동기
- 남예멘의 국제 고립 극복
- 북예멘의 지정학적 영향력 확대 욕구
- 중동 내 민족주의 통합 흐름에 따른 이상적 모델 구축 시도
통일 선언
- 날짜: 1990년 5월 22일
- 국명: Republic of Yemen (예멘 공화국)
- 수도: 사나 (정치 수도), 아덴은 경제 중심지로 남음
- 초대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 (Ali Abdullah Saleh) – 북예멘 출신
- 총리: 하이대르 아부 바크르 알 아타스 – 남예멘 출신
양국 체제와 군대, 법률의 통합 과정은 복잡하고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전개
- 1994년 남북 내전 재발
- 남예멘 일부 세력이 분리독립 시도
- 2개월 내전 후 북측 승리 → 남예멘 지도자 해외 망명
- 부족 간 갈등, 알카에다·후티 반군 등장
- 2010년대 이후 심화된 내전과 인도주의 위기 발생
- 2015년 이후 사우디 개입
-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복잡한 내전과 정치적 혼란
역사적 의미
- 중동에서 유일하게 이념(사회주의/보수 이슬람)을 넘은 국가 통일 사례
- 하지만 제도와 정체성의 융합 실패, 지속적 분열과 내전으로 이어짐
- 예멘은 21세기 대표적인 국가 실패 사례 중 하나로도 분석됨
예멘 통일은 이념을 넘은 합의였지만,
정치와 현실의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6. “음악이 울려 퍼진 곳에 침묵이 찾아왔다” 2017년 맨체스터 아레나 테러 공격

사건 개요
- 일시: 2017년 5월 22일 밤 10시 30분 (현지시간)
- 장소: 영국 맨체스터 아레나 (Manchester Arena)
- 이벤트: 아리아나 그란데 “Dangerous Woman Tour” 콘서트 종료 직후
- 피해 규모:
- 사망자: 22명 (대부분 청소년 및 어린이 포함)
- 부상자: 500명 이상
이는 영국 본토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당시 피해자 중 8살 어린이도 포함되어 전 세계적 분노와 슬픔을 자아냈습니다.
공격 방식 및 배후
- 공격자: 살만 아베디(Salman Abedi), 22세 영국 국적자
- 방식: 자살폭탄 조끼를 입고 공연장 출입구에서 자폭
- 타이밍: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대거 몰리는 시점
- 배후 조직: IS(이슬람국가) 계열이 범행 책임을 자처
범인은 리비아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테러 전 극단주의 단체와 온라인 접촉 및 리비아 방문 기록이 확인됨
사회적 파장
영국 내 반응
- 국가 테러 경보 수준 ‘최고’로 격상
- 런던 등 주요 도시에서 추모와 보안 강화 조치 시행
- 총리 테레사 메이, “이건 무고한 아이들을 겨냥한 악의”라며 비판 성명 발표
음악계와 국제 사회 반응
- 아리아나 그란데, 공연 직후 충격으로 월드 투어 중단
- 이후 6월 4일, 희생자 추모 자선 공연 “One Love Manchester” 개최
→ 저스틴 비버, 콜드플레이, 케이티 페리 등 세계적 아티스트 참여
→ 1,700만 파운드(약 250억 원) 이상의 기금 조성
문화공간 보안 강화 계기
- 세계 각국 공연장·스포츠 경기장 등 다중시설 보안 기준 대폭 강화
- 대중문화 공간의 안전에 대한 논의 확산
희생자 추모 및 이후 조치
- 맨체스터 시는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및 추모관 건립
- 유가족과 생존자를 위한 정신건강 지원 프로그램 운영
- 영국 내 극단주의 감시 및 온라인 선동 대응 강화
음악이 끝나고 울려 퍼진 것은 환호가 아닌 비명이었다.
맨체스터 테러는 전 세계 문화 공간의 취약함을 일깨운 비극이었다.
이상으로 과거의 5월 22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과거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24일에는 무슨일이? (0) | 2025.05.24 |
---|---|
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23일에는 무슨일이? (1) | 2025.05.23 |
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21일에는 무슨일이? (2) | 2025.05.22 |
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20일에는 무슨일이? (1) | 2025.05.21 |
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18일에는 무슨일이? (1) | 2025.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