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오늘
과거의 오늘, 세계속 6월 5일에는 무슨일이?
jh0711
2025. 6. 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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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의 권한을 헌법이 대신하다” 1849년, 덴마크 입헌군주제의 시작
사건 개요
- 날짜: 1849년 6월 5일
- 국가: 덴마크
- 주요 인물: 국왕 프레데릭 7세 (Frederik VII)
- 핵심 사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헌법 제정과 함께 입헌군주제 체제 도입
- 헌법 이름: 《덴마크 왕국 헌법》(Danmarks Riges Grundlov)
- 이 날은 현재까지도 ‘헌법의 날(Grundlovsdag)’로 기념됨.
역사적 배경
절대왕정의 종말
- 17세기 이후 덴마크는 강력한 중앙집권 절대군주제 국가로 운영됨.
- 프랑스 혁명(1789), 1848년 유럽 혁명의 영향으로, 시민층의 자유주의·민주주의 열망이 급증
- 특히 독일계 소수민족 문제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 분쟁이 격화됨에 따라
개헌 요구와 민중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
개혁의 시작
- 국왕 프레데릭 7세는 피를 흘리지 않고 개혁을 추진한 온건 개혁 군주
- 1848년 국민의회 구성 → 1849년 헌법 제정 및 공표
주요 내용
- 의회제도 도입: 양원제(국민의회 Folketing, 상원 Landsting)
- 표현의 자유·종교의 자유 보장
- 국민의 기본권 명시: 재산권, 신체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 군주의 권한은 상징적 위치로 축소, 실질적 권력은 내각과 국회로 이양
역사적 의의
- 덴마크는 유럽 내에서 피 없이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모범국가로 평가
- 북유럽 국가 특유의 평화적 이행과 합의 정치 문화의 출발점
- 현재까지도 덴마크는 입헌군주제 체제 유지,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
현재의 헌법 기념일 (Grundlovsdag)
- 매년 6월 5일, 정치 행사, 토론회, 시민 축제 열림
- 비공식 공휴일처럼 여겨지며, 정치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자유와 헌법의 가치를 되새기는 날
1849년 6월 5일, 덴마크는 칼이 아닌 펜으로 왕권을 나누었고,
국민과 함께 걷는 헌법의 길을 열었다.
2. “단 6일, 그러나 상처는 반세기”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6일 전쟁) 발발

사건 개요
- 발발일: 1967년 6월 5일
- 지속기간: 6일간 (1967년 6월 5일 ~ 10일)
- 참전국:
- 이스라엘 vs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 전장 지역: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
- 결과: 이스라엘의 압도적 승리와 영토 3배 확대
배경
이스라엘의 안보 위기감
- 아랍 연합군의 군사력 증강과 전면전 위협 고조
-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봉쇄 및 유엔군 철수 요구
- 시리아의 이스라엘 북부 국경 도발
선제공격 결정
-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공군 기지를 선제 타격
- 단 하루 만에 이집트 공군의 90% 파괴 → 공중 우위 확보
전쟁 전개 및 주요 전선
시나이 반도 (vs 이집트)
- 이스라엘 지상군이 시나이 반도 진격 →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
- 이집트군 1만 명 이상 전사, 수천 명 포로
요르단 전선
-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점령
-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루살렘 전역을 이스라엘이 장악
시리아 전선
- 골란 고원 점령
- 전략적 고지로, 이후 시리아와의 갈등 중심지가 됨
전쟁 결과
점령지원래 소유국이스라엘 점령 이후 상황
시나이 반도 | 이집트 | 1979년 평화협정으로 반환 |
가자지구 | 이집트 | 후에 자치정부로 이양 |
서안지구 | 요르단 | 현재까지 분쟁 지속 |
동예루살렘 | 요르단 | 이스라엘이 통합 선언 |
골란 고원 | 시리아 | 이스라엘이 병합 선언 |
세계적 반응과 영향
-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 채택: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
- 이스라엘의 압승은 아랍 세계에 깊은 상처와 자존심 손상
-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
- 이후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으로 이어짐
역사적 의의
- 현대 중동 갈등의 중심 축 형성
- 예루살렘과 서안지구 문제의 국제화
- 이스라엘은 안보 확보, 그러나 영토 점령에 따른 국제 비판과 분쟁 고착화
6일의 전쟁은 끝났지만,
60년이 넘도록 그 그림자는 중동을 떠나지 않았다.
3. “희망의 목소리가 침묵한 밤” 1968년, 로버트 F. 케네디 피격 사건

사건 개요
- 날짜: 1968년 6월 5일 (현지 시간)
- 장소: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
- 피격 인물: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 (Robert F. Kennedy)
- 직위: 전 법무부 장관, 현직 상원의원, 민주당 대통령 후보
- 상황: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 경선 승리 연설 직후 총격 피습
- 사망: 6월 6일 오전 (하루 후)
그는 누구였나?
-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RFK'로 더 널리 알려짐
- 1960년대 미국 내 시민권 운동, 빈곤층 지원, 반전(베트남전) 정책에 앞장섬
- 1968년 대통령 후보로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아젠다를 내세워 큰 지지 획득
-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4월) 후, 미국 사회의 통합을 위한 메시지로 주목받음
⚔️ 암살의 전말
- 경선 승리를 자축하던 케네디는 호텔 주방 통로를 지나던 중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 시르한 시르한(Sirhan Sirhan)**에게 피격 - 22구경 리볼버로 근거리 3발 피격, 즉시 병원 이송
- 26시간 후 끝내 사망
사회적 충격
- 1960년대 미국에서 3번째 대통령급 인사의 암살
(JFK, 말콤 X, 마틴 루터 킹에 이어) - 미국 사회는 정치적 폭력과 분열, 인종 문제, 전쟁 갈등 등으로 혼돈에 빠짐
- 젊은 층과 소외계층의 정치적 희망 상실감 확산
암살범과 동기
- 시르한 시르한은 케네디의 친이스라엘 성향을 암살 이유로 진술
- 2차례 가석방 심사 모두 기각
- 여전히 “음모론”과 “단독 범행” 간의 논쟁 지속
역사적 의의
-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은 미국 진보정치의 중요한 전환점
-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 역사와 베트남전·인종정책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사에서 ‘잃어버린 미래’의 상징으로 회자됨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시대의 가능성을 묻었고,
로버트 F. 케네디는 ‘정의로운 미국’을 꿈꾸던 마지막 희망이었다.
4. “굿바이, 미스터 프레지던트” 2004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서거

사건 개요
- 날짜: 2004년 6월 5일
- 사망 원인: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합병증
- 향년: 93세
- 직위: 제40대 미국 대통령 (1981~1989)
- 장례식: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세계 각국 정상들이 조문
로널드 레이건은 누구였나?
- 배우 출신 대통령
- 1930~50년대까지 영화배우로 활동
- 이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으로
- 보수주의의 상징적 인물
- 작은 정부, 감세, 자유시장 경제를 표방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추진
- “정부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라는 유명한 연설로 철학을 명확히 함
대외정책과 냉전 종식
- 강력한 반공 정책
-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로 규정
- 군비 증강과 SDI(전략방위구상) 등 군사력으로 소련을 압박
-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협상
- 레이캬비크 회담, INF 조약 체결 등
- 냉전의 해체와 동·서 냉전 블록 완화에 결정적 역할
대중 정치의 달인
- 뛰어난 언변과 대중 소통 능력
- 언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위대한 소통가(The Great Communicator)’로 불림
- 미국 국민들에게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심어주며 인기 높은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록
서거 이후
- 2004년 6월 11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국민 추모식 진행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에 안장
- 미국 보수주의와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로 여전히 회자됨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로 시작해 냉전을 끝낸 대통령이었고,
그의 서거는 한 시대의 마침표이자 미국 보수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상으로 과거의 6월 5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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