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오늘
과거의 오늘, 세계속 6월 2일에는 무슨일이?
jh0711
2025. 6. 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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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명의 중심이 무너진 날”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정리

사건 개요
- 날짜: 455년 6월 2일
- 장소: 서(西)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
- 약탈자: 반달족(Vandals)
- 지도자: 가이세릭(Geiseric)
- 피해자: 서로마 제국과 로마 시민들
- 사건 명칭: 로마 약탈 (Sack of Rome)
역사적 배경
서로마 제국의 혼란
- 5세기 중반, 서로마는 정치 혼란, 군사력 약화, 내부 반란으로 쇠퇴
- 455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이후 무정부 상태
- 가이세릭은 황제의 약속된 결혼 동맹이 파기되었다는 명분으로 로마 원정 감행
반달족의 등장
- 반달족은 게르만계 민족으로, 원래는 오늘날 독일 동부 지역 출신
- 5세기 초, 알란족과 함께 이동하며 북아프리카에 정착
-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해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부상
- 당시 로마의 지중해 무역과 군사에 큰 위협
약탈의 전개
- 455년 6월 2일, 가이세릭의 반달 해군이 로마에 상륙
- 무력 저항 없이 도시 입성 (로마의 방어력 부재)
- 14일간 조직적인 약탈 진행
- 황궁, 교회, 귀족 저택의 금은보화 약탈
- 유명 예술품과 종교 유물도 대량 반출
- 로마 교황 레오 1세는 시민 학살은 막았지만, 약탈은 막지 못함
일부 기록에 따르면 “비교적 질서 있는 약탈”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화·경제적 손실은 치명적이었음.
역사적 의미
로마 제국 몰락의 상징
-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에 이어
→ 455년 반달족의 약탈은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 -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결국 오도아케르에 의해 공식 멸망
‘반달리즘(Vandalism)’의 어원
- 반달족의 로마 약탈에서 유래
- 예술, 문화재, 공공재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의미
- 오늘날도 공공기물 파손 등에서 이 단어 사용
종교적 관점
- 교황 레오 1세는 반달족 지도자와 협상해
→ 학살을 막고 교회 재산 일부 보호 - 하지만 로마가 더 이상 신성 불가침의 도시가 아님을 상징함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은 문명의 상징이
무기력하게 무너진 날이었고, 세계사는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2. “왕관을 벗고, 시민의 나라로”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 체제 확립 이야기

사건 개요
- 날짜: 1946년 6월 2일
- 사건명: 이탈리아 국민투표(국민 국민투표, Referendum Istituzionale)
- 결과: 군주제 폐지 → 공화국 수립 확정
- 비율: 약 54.3% 찬성 vs 45.7% 반대
- 군주 퇴위: 움베르토 2세 (Umberto II), 왕위 34일 만에 망명
- 체제 전환: 이탈리아 왕국 → 이탈리아 공화국(Republica Italiana)
역사적 배경
무솔리니와 파시즘의 그림자
- 1922년부터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파시스트 정권이 지속
-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 파시즘의 집권을 방조하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함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
- 파시스트 동맹국으로서 나치 독일과 함께 참전한 결과
→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정치·경제적으로 붕괴
→ 국민의 불신은 왕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짐
공화국 수립, 어떻게 이뤄졌을까?
-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전역에서 국민투표 실시
- 남부 지역은 군주제 지지
- 북부·중부 지역은 공화제 지지
- 여성에게도 최초로 투표권 부여
- 결과적으로 54.3%가 공화국을 선택
- 국왕 움베르토 2세는 결과 발표 후 자진 망명 (포르투갈로)
이후 전개
- 6월 10일: 국왕 공식 퇴위
- 6월 18일: 헌법 제정 의회 구성
- 1948년 1월 1일: 민주 공화국 헌법 발효 → 오늘날까지 유지
역사적 의의
민주주의의 시작
- 20세기 중반, 이탈리아는 입헌 군주국에서 완전한 공화정으로 전환
- 국민이 스스로 국가 정체성을 선택한 상징적 사건
여성 참정권 확대
- 이번 투표에서 이탈리아 여성들이 처음으로 전국 선거에 참여
- 유럽에서 여성 참정권이 본격 확산되는 계기 중 하나
6월 2일 = ‘공화국의 날’ (Festa della Repubblica)
- 현재 이탈리아의 국가공휴일, 매년 로마에서 군사 퍼레이드와 문화 행사 진행
1946년 6월, 이탈리아 국민은 왕관을 내려놓고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3. “왕좌에서 내려온 축구 황제” 2015년 FIFA 회장 제프 블라터 사임 사건 정리

사건 개요
- 날짜: 2015년 6월 2일
- 사건: 제프 블라터(Sepp Blatter) FIFA 회장 전격 사임 선언
- 직위: FIFA 회장 (1998년 ~ 2015년)
- 사임 배경: FIFA 고위 인사들의 대규모 부패 스캔들 및
→ 본인 관련 의혹과 국제 사회의 압박 - 후임 선거: 2016년 지안니 인판티노(Gianni Infantino) 선출
사임까지의 배경
부패 스캔들 폭로 (2015년 5월)
-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스위스 검찰이
FIFA 임원들에 대한 뇌물·횡령 혐의 조사 착수 - 2018 러시아, 2022 카타르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도
거액의 뇌물 수수 및 부정 거래 정황 드러남
블라터 본인도 의혹 대상
- 스위스 검찰은 블라터가 UEFA 회장 미셸 플라티니에게 부적절한 자금을 송금한 혐의로 수사 시작
- 블라터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국제 축구계와 언론의 신뢰 상실
사임 당시 주요 발언
“FIFA는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
나는 축구를 위해, 내 자리에서 물러난다.”
– 제프 블라터 (2015.6.2)
불과 4일 전인 5월 29일, FIFA 회장으로 5선 연임에 성공한 직후의 갑작스러운 발표여서 세계 축구계는 충격에 빠짐.
여파 및 변화
FIFA 구조 개혁
- 이후 FIFA는 지배 구조와 회계 시스템 개편 추진
- 회장 임기 제한, 독립 윤리 위원회 설립 등 도입
징계 조치
- 블라터와 플라티니 모두 FIFA 윤리위로부터 8년 자격 정지 처분
→ 이후 항소로 일부 감경 - 블라터는 2028년까지 FIFA 관련 모든 활동 금지
월드컵 개최 신뢰 추락
- 2022 카타르 월드컵은
“돈이 만든 월드컵”이라는 이미지 타격 입음
역사적 의미
- 블라터의 사임은 단순한 퇴진이 아닌,
세계 축구 행정의 대전환을 불러온 계기 - FIFA가 투명성, 윤리성, 신뢰 회복을 모색하게 된 전환점
2015년 블라터의 퇴진은 축구계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자,
돈보다 정의가 앞서야 한다는 외침의 시작이었다.
이상으로 과거의 6월 2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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