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23일에는 무슨일이?
1. “바람과 튤립의 나라, 제국에 맞서다”: 1568년 네덜란드의 스페인 독립 선언과 80년 전쟁의 시작

시대적 배경
- 시대: 16세기 유럽, 종교개혁과 제국주의 확장기의 교차점
- 지배자: 스페인 제국의 펠리페 2세 (가톨릭 강경 왕정)
- 지배 대상: 네덜란드 17개 주, 당시 스페인의 통치 하에 있음
- 문제 요약:
- 스페인의 가톨릭 강제화 정책
- 중앙집권적 지배와 과도한 세금 부과
- 신흥 개신교(칼뱅주의) 확산 → 종교 탄압과 갈등 심화
네덜란드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종교·사상의 자유를 중요시한 지역으로
스페인의 통치는 정치·경제·종교적으로 큰 반발을 불렀습니다.
독립 선언과 전쟁의 시작
- 시점: 1568년 4월
- 사건: 오라녜 공 빌럼(William of Orange)이 주도하여
스페인에 대항한 무장 봉기 시작 → ‘80년 전쟁’(1568–1648)의 서막 - 의미: 네덜란드는 사실상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천명
최초의 주요 전투인 헤일리겜 전투에서 반란군은 패배했으나,
이후 전쟁은 장기화되며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쟁의 특징과 전개
- 종교 전쟁의 성격
- 개신교(칼뱅주의) 네덜란드 vs 가톨릭 스페인
- 게릴라전·수공도시 방어 등 특이 전략
- 저지대 지형을 활용한 홍수 유도 전술로 스페인군 방어
- 경제적 동기
- 상업 중심지인 암스테르담·로테르담의 무역 자율성 확보 욕구
- 스페인의 제국적 피로 누적
- 지속되는 전쟁 비용, 무적함대 실패(1588년) 등으로 스페인 약화
독립 확정과 이후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 네덜란드의 독립 국제적 승인
- 국명: 네덜란드 공화국(Republic of the Seven United Netherlands)
- 결과:
- 유럽 최초의 공화정 체제 국가
- 상업과 해상 제국의 황금기(17세기) 개막
- 종교·언론·철학의 자유 확대, 스피노자·데카르트 등 등장
1568년, 네덜란드의 독립 선언은
제국의 그림자 아래 피어난 자유의 불꽃이었다.
2. “하늘을 향한 수직의 첫걸음”: 1939년, 미국 해군과 헬리콥터 첫 비행 성공
사건 개요
- 날짜: 1939년 5월 26일
- 장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트랫포드(Stratford)
- 기체: VS-300 (비에스-300)
- 제작자: 이고르 시코르스키(Igor Sikorsky), 러시아계 미국인 항공기술자
- 후원 및 감독: 미국 해군 (US Navy)
- 성격: 세계 최초의 성공적인 실용 헬리콥터 프로토타입 비행
이 비행은 현대 헬리콥터 설계의 기초를 확립한 시험 비행으로
VS-300은 싱글 로터 + 수평 꼬리 로터 구조를 최초로 완성한 기체였습니다.
이고르 시코르스키란 누구?
- 출생: 러시아 제국 키예프 (현 우크라이나)
- 1919년 미국 망명 후, Sikorsky Aircraft Corporation 설립
- 초기 고정익 항공기부터 헬리콥터까지 개발한 현대 회전익 항공기 설계의 선구자
VS-300은 그의 회사와 미국 해군이 공동으로 실험하며
헬리콥터 기술 상용화의 토대를 다졌습니다.
VS-300의 특징
- 길이: 약 7.6m / 중량: 약 1,500kg
- 엔진: 75마력 Lycoming 엔진
- 속도: 약 64km/h
- 비행 지속 시간: 초창기엔 1~2분 → 점차 향상됨
- 혁신적 구조:
- 하나의 주요 회전날(메인 로터)
- 회전력을 상쇄하는 꼬리 로터 장착 → 오늘날 헬리콥터 구조의 표준화 시작
역사적 의의
- 현대 헬리콥터의 기술적 토대 제공
→ 이후 군사, 의료, 구조, 산업용 헬기 탄생 기반 마련 - 미 해군 항공 전략의 전환
- 고정익 항공기의 한계를 보완할 수단 확보
- 전투 후 구조, 잠수함 탐색, 수송 작전 등에 헬기 도입
- 제2차 세계대전 중 실전 투입
- 1944년부터 Sikorsky R-4 헬리콥터 실전 투입
- 역사상 최초의 전시 중 구조 헬리콥터 작전 수행
이후의 발전
- 시코르스키사는 이후 블랙호크(Black Hawk), 씨킹(Sea King) 등
수많은 군용/민간 헬리콥터 모델을 개발 - 헬기는 오늘날 응급 구조, 화재 진압, 물류 수송, 기상 관측 등
다방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항공 수단으로 발전
1939년의 첫 회전익 비행은
공중 수직이동의 역사를 연 ‘프로펠러 위의 혁명’이었다.
3. “불타는 들판, 캘리포니아의 붉은 경고” 2003년, 리버사이드 카운티 대형 산불 발생

사건 개요
- 발생 시점: 2003년
-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카운티
- 산불 이름: 오크 파이어(Oak Fire) 등 여러 개의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 피해 규모:
- 수만 헥타르(ha) 이상의 산림 및 초지 소실
- 수백 채의 가옥 전소
- 주민 수천 명 강제 대피
-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
이 산불은 2003년 가을,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건의 대형 산불 중 하나로, 특히 리버사이드 지역에서는 인명 피해와 구조 활동의 어려움이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산불의 원인
- 기후 조건
- 이례적인 가뭄과 고온 건조한 날씨
- 습도 10% 이하의 초건조 상태
- 산타아나 강풍(Santa Ana Winds)
- 시속 100km에 달하는 돌풍
- 불길 확산을 급격히 가속화함
- 인간 활동
- 일부 산불은 방화 또는 부주의한 캠핑·흡연 등이 원인으로 추정
- 도심 인근까지 산불이 번지며 주택가 위협
대응 및 구조
- 캘리포니아 소방국(CAL FIRE)과 연방 산림청(USFS) 동원
- 소방헬기, 급수기, 대형 구조대가 투입
- 연방정부는 비상사태 선포, 국방부 병력 지원
- 피난소 설치 및 동물 구조 작전도 병행
이후 영향 및 교훈
- 캘리포니아 산불 대응 체계 강화
- 위성 기반 조기 감지 시스템 확대
- 산불 고위험 지역의 건축 규제 및 숲 관리 강화
- 기후 변화의 현실 경고
- 연례적으로 대형 산불이 반복되는 구조 형성
- “산불 시즌”이라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로 기후 위기와 직결
- 보험 및 주택 정책 변화
- 산불 위험 지역의 보험료 인상, 재건 지원 기준 강화
- 산불과 건강
- 대기오염 및 미세먼지 급증 → 호흡기 질환자 응급실 급증
2003년 리버사이드의 불길은
기후와 인간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낸 재난의 상징이었다.
4. “민주주의 위에 군홧발이 덮이다” 2014년 태국 군부 쿠데타 발생

사건 개요
- 일시: 2014년 5월 22일
- 장소: 태국 방콕 중심부 및 전국 주요 도시
- 주체: 프라윳 찬오차(Prayut Chan-o-cha) 육군 총사령관
- 피해: 정부 해산, 헌법 일시 정지, 정당 활동 중단, 언론 검열 시행
국 현대사에서 12번째 쿠데타였으며,
군부가 정권을 직접 장악하고 총리를 맡은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사건의 배경
정치적 갈등 격화
-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계열 vs 반탁신 보수 세력 간 대립
- 2006년 탁신 축출 후에도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가 집권하며
다시 정치적 긴장 고조
부패 및 법적 논란
- 잉락 총리는 쌀 보조금 정책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임
- 이후 태국 전역에서 친정부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며
치안 불안 및 국정 마비 상태로 악화됨
쿠데타 전개 과정
- 군부, 비상계엄령 선포 (2014.5.20)
- 모든 정당·시민사회 지도자 회동 명령
- 5월 22일 오후, 프라윳 장군이 TV 생중계로 쿠데타 선언
- 의회 해산, 헌법 중지, 야간 통행금지, 언론 통제 등 시행
군부는 "질서 회복과 국가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주장
쿠데타 이후 프라윳 총리 시대
- 2014년 8월, 프라윳 찬오차가 군사정권 내 과도정부 총리 취임
- 2019년까지 군부 기반 헌법 제정 및 총선 연기
- 이후 민간정부 출범 명목으로 군부연합 정당이 총선 승리
→ 실질적 권력은 그대로 유지
국제적 반응과 영향
국제사회의 비판
- 유럽연합·미국·유엔 등은 쿠데타를 강하게 비판
- 군사원조 및 일부 무역 협력 중단
- 태국의 국제 신뢰도 하락, 아세안 내 위상도 일시 저하
국내 영향
- 정치 표현의 자유 제한, 시위 금지
- SNS·언론 감시 강화
- 정치인·활동가 탄압 → 망명 사례 다수 발생
경제적 영향
- 단기적으로는 혼란 진정, 증시 회복
- 그러나 외국인 투자 심리 위축
- 관광업은 강력한 치안 통제 덕분에 비교적 유지
2014년 태국 쿠데타는
혼란을 막기 위한 명분 아래, 민주주의를 잠재운 군화 소리였다.
5. “도시를 장악한 검은 깃발, 민다나오의 불길” 2017년 마라위 전투: 필리핀 군과 이슬람 무장단체의 충돌
사건 개요
- 일시: 2017년 5월 23일 ~ 10월 23일 (약 5개월)
- 장소: 필리핀 민다나오섬 라나오델수르 주 마라위 시
- 교전 세력:
- 정부 측: 필리핀 군, 경찰, 특수부대
- 반군 측: 마우테 그룹, 아부사야프, IS(이슬람국가) 지지 세력
- 사망자: 약 1,100명 이상 (군·경·민간인·무장세력 포함)
- 피난민: 약 40만 명 이상의 주민이 도시 탈출
도심 전투와 민간인 피해가 집중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 최대의 도시 내 전투로 기록됩니다.
전투의 시작
- 필리핀 군이 IS 관련 테러리스트 이스닐론 하필론 체포 시도 중
- 마우테(Maute) 무장단체가 조직적으로 반격하며 마라위 시 장악
- 검은 IS 깃발이 도시 중심에 걸리고, 시청·병원·대학 등 공공시설 점령
- 두테르테 대통령은 즉시 계엄령 선포 (민다나오 전역)
전투 양상
- 시가전 중심의 격렬한 전투
- 정부군은 건물 단위로 저격수·지뢰에 맞서며 수복
- 공습, 박격포, 중화기까지 동원된 고밀도 도시 교전
- IS의 동남아 확장 거점 시도
- 마라위를 ‘칼리프 수도’로 삼으려는 전략
- 외국인 전투원도 참여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 인질극 및 인권 유린
- 민간인 인질 사용, 종교적 차별 처형 발생
- 반군은 여성·어린이까지 방패로 활용
결과 및 영향
필리핀 정부 입장
- 2017년 10월 23일, 마라위 완전 탈환 선언
- IS 지역 지부 활동 차단에 성공
- 그러나 민다나오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존재
지역사회 피해
- 마라위는 거의 완전 붕괴 상태
- 문화유산과 주택, 모스크 등 대부분 파괴
- 복구 사업 지연, 수십만 명 피난민의 귀환 문제 여전
국제적 반응
- 미국, 호주 등은 정보·장비 지원
- IS의 동남아 확산 가능성에 대한 글로벌 경계 강화
- 유엔은 인도적 위기 및 피난민 지원 촉구
2017년 마라위 전투는
도심 속에서 벌어진 현대전의 참혹함과 극단주의의 확산을 경고한 사건이었다.
이상으로 과거의 5월 23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