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오늘, 세계속 5월 19일에는 무슨일이?
1. “유럽 패권의 주인이 바뀌다” 1643년 로크루아 전투 (Battle of Rocroi)

사건 개요
- 날짜: 1643년 5월 19일
- 장소: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 로크루아(Rocroi) 인근
- 전쟁 맥락: 30년 전쟁(1618~1648) 중 프랑스-스페인 전선
- 교전국: 프랑스 왕국 vs. 스페인 제국
- 지휘관:
- 프랑스: 루이 2세 드 부르봉 (앙기앵 공작)
- 스페인: 프란시스코 데 멜로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서 스페인 테르시오(Tercio) 전술의 종말과,
프랑스 군사력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배경
30년 전쟁
- 독일 중심의 종교 전쟁에서 시작된 유럽 전역의 세력 전쟁
- 프랑스는 카톨릭이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스페인) 견제를 위해 참전
- 1635년부터 스페인과의 전면전 돌입
전쟁 직전의 정치 상황
- 루이 13세 사망 직후, 루이 14세가 5세 나이로 즉위
- 어린 국왕 대신 마자랭 추기경과 안느 왕비 섭정 체제
- 왕권의 안정성을 보여줄 필요성이 큰 상황에서 로크루아 전투 발생
전투의 전개
- 프랑스군 약 23,000명, 스페인군 약 27,000명
- 스페인군은 전통적 '테르시오' 진형(창병과 총병 혼성 편성)의 강력한 방어 전술 구사
- 프랑스군은 앙기앵 공작(훗날 ‘대콩데’라고 불림)의 기동력과 포병력을 활용한 혁신적 전술 전개
전투 결과:
- 프랑스군 결정적 승리
- 스페인군 약 6,000명 전사, 대포·깃발 다수 손실
- 테르시오 부대 다수가 항복
전후 영향
- 스페인 제국의 군사적 패권 종식
- “무적함대” 시대를 이끌던 스페인 육군의 몰락
- 이후 유럽 패권은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으로 이동
- 프랑스 군사력의 도약
- 프랑스는 이후 루이 14세 시기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
- 로크루아는 '프랑스의 진짜 군대 시대'의 시작으로 불림
- 전술의 대전환
- 스페인의 '방어적 테르시오' 종식 → 기동성 중심의 전술 체계로 전환
- 30년 전쟁 종식의 서막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전쟁 종료
- 근대 국제질서의 기초 형성
역사적 의의
- 근세 유럽의 힘의 중심이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간 전환점
- 중세식 중장보병 중심 전술이 종말을 고하고,
→ 화포와 기병 중심의 근대식 전쟁 양상이 확립 - 정치, 군사, 전략의 교차로에서 탄생한 ‘패권 교체’의 상징적인 전투
1643년 5월, 로크루아 평원에서 총과 말발굽이 만든 울림은
유럽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을 알렸다.
2. “기적은 텐트 아래에서 시작된다” 1884년, 링링 형제 서커스 창립

사건 개요
- 날짜: 1884년 5월 19일
- 장소: 미국 위스콘신주 바라부(Baraboo, Wisconsin)
- 창립자: 링링 가문의 다섯 형제 (알, 알프레드, 찰스, 존, 헨리)
- 단체명: Ringling Brothers Circus
- 형태: 이동식 서커스(Traveling Circus), 동물쇼, 곡예, 마술, 공연 등이 포함된 종합 엔터테인먼트
링링 서커스는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 대형 서커스로 성장했으며,
이후 ‘바넘 & 베일리’와의 합병(1919'을 통해 세계 최대의 서커스단이 되었습니다.
창립 배경
- 1880년대 미국은 증기철도 발전과 도시 확장으로 대중 오락산업이 성장하던 시기
- 당시 사람들은 극장이나 영화보다 이동형 오락 형태인 서커스에 열광
- 링링 형제는 원래 마을 단위로 악기 연주·곡예 등 소규모 공연을 하며 시작
- 1884년, ‘진짜 서커스단’을 꾸려 첫 순회 공연 시작
링링 서커스의 특징
- 이동형 거대 텐트 구조
→ 기차로 이동하며 수천 명이 관람할 수 있는 거대한 텐트 설치 - 다양한 퍼포먼스 구성
→ 공중 곡예, 외줄타기, 불쇼, 사자 조련, 코끼리 행진 등 - 가족 중심 운영
→ 형제 모두 경영과 예술 분야에 역할 분담 -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
→ 지역별로 순회하며 대중에게 "서커스는 모두의 축제"라는 인식 확산
바넘 & 베일리와의 합병
- 1907년, 경쟁사인 Barnum & Bailey Circus를 인수
- 1919년, 두 브랜드가 합쳐져 “Ringling Bros. and Barnum & Bailey Circus” 탄생
- "The Greatest Show on Earth"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해짐
쇠퇴와 폐막
- 20세기 중반 이후 TV, 영화 등 미디어 발달로 서커스 산업 하락
- 2017년, 동물 학대 논란, 경영난, 시대 변화 등으로 해체 선언
- 2023년, 동물 없는 새로운 컨셉으로 부활 예정
문화사적 의의
- 미국 대중문화의 시초
→ 서커스는 “모두가 웃고 감동하는 대중의 예술”로 발전 -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반 제공
→ 투어 공연, 브랜드화, 캐릭터 중심 구성 등 현대 공연 방식에 영향 - 논란과 반성의 역사도 포함
→ 동물학대·인권 문제 등, 서커스가 지닌 복합적 의미 성찰
1884년,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서커스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무대가 되었고, 시대의 흐름 속에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3. “우산은 비를 피하는 도구가 아닌, 도시인의 품격이었다” 1743년, 장-피에르 크리스탱의 현대식 우산 발명
사건 개요
- 연도: 1743년
- 인물: 장-피에르 크리스탱 (Jean-Pierre Christin)
- 장소: 프랑스 파리
- 발명품: 가볍고 접이식 구조의 현대식 우산 (parapluie moderne)
- 의의: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우산의 기본 구조를 제시한 최초의 사례
비를 피하는 기능 외에도, 개인의 품격과 스타일을 보여주는 소품으로 우산을 발전시킨 첫 계기입니다.
이전의 우산과 차이점
- 고대 이집트, 중국, 로마에서도 해를 가리기 위한 ‘파라솔(parasol)’ 형태의 우산 존재
- 중세 유럽에서는 귀족 여성들 중심의 고정식 해가림용 도구
- 17~18세기 초까지는 비를 막는 방수 재질, 접이식 구조 없음
크리스탱의 발명 특징
- 방수 기능 강화: 천에 기름 또는 수지 코팅 → 비를 효과적으로 차단
- 접이식 금속 프레임 사용 → 휴대성 및 내구성 향상
- 손잡이 및 기둥 일체형 디자인 → 상업적 생산 가능성
사회문화적 배경
- 18세기 프랑스는 패션과 도시 문명 중심지
- 파리의 거리 문화는 귀족, 예술가, 시민의 실용성과 우아함의 결합을 요구
- 크리스탱의 우산은 기능과 스타일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도구로 각광받음
역사적 의의
- 현대 우산의 구조적 원형 제시
→ 금속 프레임, 접이식 손잡이, 방수천 등 현재 우산의 기본 디자인 확립 - 개인의 기호를 반영한 실용품
→ 기능적 도구에서 패션 액세서리로의 전환 시작 - 산업화와 대량생산으로 연결
→ 이후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 기술 발전 및 디자인 다양화
문화적 상징성
- 프랑스에서는 우산이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닌,
우아함·지성·도시적 삶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음 - 이후 “우산을 든 신사”, “파리지앵의 우아함”이라는 이미지로 확산
1743년 파리에서 시작된 작은 아이디어는,
오늘날 전 세계인의 일상과 패션을 함께 지켜주는 우산의 시초가 되었다.
4. “제국의 몰락 위에 민족주의가 불붙다” 1919년 그리스군 이즈미르 점령과 그리스-터키 전쟁의 시작
사건 개요
- 날짜: 1919년
- 장소: 이즈미르(Smyrna, 현재 터키 제3의 도시)
- 주체: 그리스 왕국 vs. 오스만 제국 (후기), 이후 터키 민족운동군
- 전쟁 기간: 1919년 ~ 1922년
- 결과: 터키의 승리, 로잔 조약으로 영토 확정 및 인구 교환
이 사건은 단순한 도시 점령이 아닌,
오스만 제국 해체 후 유럽 열강의 개입과 민족주의 충돌이 본격화된 기점이었습니다.
배경
1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
- 오스만 제국, 1차 대전에서 독일 측과 동맹 → 패전국
- 1918년 무드로스 휴전 협정 체결 → 연합국의 군사적 통제
- 연합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은 오스만 영토 분할 계획
그리스의 입장
- ‘대그리스주의(Megali Idea)’: 옛 비잔틴 제국 영토 회복 목표
-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연합국과 협력하여 소아시아(현재 터키 서부) 점령 시도
- 이즈미르는 그리스계 인구가 많았던 도시로 상징성도 큼
점령과 전투
- 1919년 5월 15일, 그리스군이 연합국의 승인 하에 이즈미르 상륙 및 점령
- 점령 첫날부터 터키계 시민들과 충돌 발생 → 유혈 사태로 확산
- 이즈미르 점령은 곧 터키 민족주의 운동을 자극
터키 민족운동의 반격
-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삼순에 상륙
→ 터키 독립전쟁 개시 - 이후 3년간 양측은 서아나톨리아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 전개
전쟁의 종말
- 1922년 9월, 터키군이 이즈미르 재탈환
- 그리스계 주민의 대탈출, 수천 명 사망 → '스미르나 대화재' 발생
- 1923년 로잔 조약 체결:
- 터키 현대국가 승인
- 그리스-터키 간 인구 교환: 약 160만 명의 강제 이주 발생
역사적 의의
- 오스만 제국의 최종 붕괴
→ 터키 민족주의가 오스만 다민족 체제를 대체 - 현대 터키의 탄생 계기
→ 아타튀르크의 정치·군사적 기반 형성 - 국제 정치와 민족주의의 충돌
→ 열강의 조정 하에 이뤄진 분할 시도가 오히려 분쟁을 격화시킴 - 20세기 대규모 인구 교환의 대표 사례
→ 근대 국가 형성과정에서의 강제 이주·난민 문제 드러남
1919년, 이즈미르를 둘러싼 총성이 울렸고,
그 총성은 곧 오스만 제국의 종말과 터키 공화국의 서막이 되었다.
5. “열린 문이 닫히기 시작한 날” 1921년 미국 ‘이민 할당법’ 통과
사건 개요
- 정식 명칭: Emergency Quota Act
- 통과 일자: 1921년 5월 19일
- 시행 주체: 미국 연방 의회 및 행정부
- 핵심 내용: 각국 출신 이민자의 수를 1910년 인구 기준 3%로 제한
이민 할당법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출신국가별 이민 제한’을 명문화한 법률로,
특히 동유럽·남유럽·아시아 출신 이민자에게 큰 제약을 주었습니다.
법 제정 배경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 분위기
- 전쟁 후 경제 침체, 실업 증가 →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
- ‘적색 공포(Red Scare)’: 러시아 혁명 여파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
- 문화적 순수성 강조: 앵글로색슨 중심주의 강화
이민 급증
- 1880~1920년: 동유럽·이탈리아·폴란드 등지에서 대량 이민
- 미국 사회는 이민자의 언어, 종교, 정치 사상에 대해 불안감 가중
주요 내용과 특징
- 1910년 미국 인구조사 기준으로 각국 이민자 수의 3%만 허용
- 예: 1910년 미국 내 이탈리아계 인구가 10만 명이었다면, 연간 신규 이민은 최대 3,000명
- 쿼터(cap)는 국가별로 적용됨 → 특히 동유럽, 남유럽, 아시아권 이민자 대폭 제한
아시아계 대상 배제 강화
- 기존부터 존재하던 중국인 배제법(1882), 일본인 협정(1907) 등
- 이번 법으로 아시아계 전반에 대한 입국 장벽 높아짐
후속 변화
- 1924년 이민법(National Origins Act): 쿼터 기준을 1890년으로 앞당기고, 더 강력한 제한
- 이로 인해 1920~1965년까지 ‘이민 냉각기’로 이어짐
- 미국 인구 구성 변화 둔화 → 백인 중심의 이민 정책 고착화
역사적 의의
- 미국 이민정책의 체계화 시작
→ 출신국가별 정량 규제라는 기준 확립 - 인종주의 및 민족주의의 제도화
→ 미국 내 우월주의적 시각이 법제화됨 - 다문화사회에 대한 경계 강화
→ 사회 통합보다 배제와 통제가 우선되던 시기 - 현대 이민제도의 선례
→ 오늘날 쿼터, 난민 기준, 국가별 비자 정책의 기반이 됨
현재적 평가
- 미국적 다양성과 포용성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
- 동시에, 국가 이익과 사회 통합 간 균형을 고민하는 계기로도 작용
- 1965년 이민개혁법(하트-셀러 법)으로 폐지될 때까지 40년간 지속된 구조
1921년, 미국은 처음으로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열림과 닫힘 사이에서, 이민의 시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6.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프레지던트” 1962년 마릴린 먼로의 전설적인 생일 축하 공연

사건 개요
- 날짜: 1962년 5월 19일
- 장소: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 행사 명칭: 케네디 대통령 45세 생일 자선 축하행사
- 공연 주인공: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 공연곡: “Happy Birthday, Mr. President”
이 공연은 정치인과 연예인의 관계, 성적 매력의 상징화, 스타 시스템의 정점을 보여준 역사적 장면으로 평가받습니다.
공연의 상징성
전설적인 ‘해피 버스데이’의 순간
- 먼로는 속이 비칠 듯한 크리스털 장식 누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등장
- 마이크 앞에서 부드럽고 느린, 유혹적인 목소리로
-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라고 속삭이듯 노래함 - 케네디 대통령은 무대에 올라와 웃으며
- “이제 내 정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라고 농담함
공연 이후의 파장
- 언론과 대중의 폭발적 반응
- 공연 장면은 즉시 미국 전역에 보도
- 먼로의 의상과 목소리는 “유혹의 정치”라는 표현으로 불릴 정도
- 케네디와의 관계설 증폭
- 이 공연을 계기로 둘 사이의 불륜설이 본격 대중에 알려짐
- 이후 먼로의 갑작스러운 사망(1962년 8월)과 연결되며 음모론의 씨앗으로 작용
- 드레스의 역사적 가치
- 공연 당시 입은 드레스는 2016년 경매에서 약 48억 원(약 480만 달러)에 낙찰
- 이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 중 하나
문화적 의미
- 정치와 연예의 접점이 시대 아이콘을 만들어낸 사례
- 여성 연예인의 이미지 소비, 권력과의 관계에서의 취약함 등 성별 권력 문제의 상징
- 이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장면을 오마주 (예: 마돈나, 마일리 사이러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오늘날의 재조명
- 마릴린 먼로는 그 자체로 대중문화의 기호이자 상징
- 이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영상, 전시, 뮤지컬, 영화 등에서 반복 재현
- 2022년 넷플릭스 영화 《블론드(Blonde)》에서도 재해석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프레지던트.”
1962년 뉴욕의 밤, 그 한마디는 정치와 섹시함, 권력과 슬픔이 뒤섞인 전설이 되었다.
7. “왕실의 문을 두드린 새로운 시대” 2018년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
사건 개요
- 일시: 2018년 5월 19일
- 장소: 영국 윈저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신랑: 해리 왕자 (Prince Harry, 본명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 신부: 메건 마클 (Meghan Markle, 미국 배우 출신)
- 하객 수: 약 600명 (세계 정상·연예계 인사 포함)
- TV 시청자 수: 전 세계 약 20억 명 이상
이 결혼은 영국 왕실 역사상 가장 상징적이고 파격적인 결합 중 하나로,
인종, 국적, 직업, 이혼 경력 등 기존의 전통적 왕실 규범을 뛰어넘는 사례였습니다.
결혼식의 상징성
다양성과 포용
- 메건은 흑인 혼혈 여성, 이혼 경력, 미국 시민권자, 직업 여성(배우)
- 이는 보수적인 영국 왕실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의미를 지님
- 혼인식에는 흑인 복음합창단과 흑인 주교 마이클 커리의 열정적 설교가 포함되며 미국 흑인 문화 요소가 융합됨
간결하고 감동적인 형식
- 윌리엄 왕세손이 신랑 들러리를 맡음
- 신부 메건은 아버지 대신 찰스 왕세자가 동행하여 입장
- 메건은 디올 출신 디자이너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디자인한 심플한 드레스 착용
사회적 반향
- 현대 왕실의 개혁적 상징
→ 영국 왕실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고자 하는 태도 반영 - 미디어 관심 집중
→ 넷플릭스, HBO 등 다양한 다큐·드라마에서 재해석 - 비판과 기대의 교차
→ 일부 보수층의 반감 vs 젊은 세대의 환호 - ‘해리 & 메건’ 브랜드화
→ 이후 왕실 독립 선언 → 미국 이주 → 아치 & 릴리벳 출생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출판 등으로 활발한 공적 행보
문화사적 의의
- 왕실 전통과 현대 가치의 접점
→ 사랑, 자율, 개성, 다양성이라는 키워드가 전통을 깨우다 - 글로벌한 관심과 정체성 논쟁
→ 단순한 결혼식을 넘어, 왕실의 역할·언론의 윤리·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담론 촉발
2018년 5월, 해리와 메건의 결혼식은
단지 왕자와 여배우의 로맨스를 넘어, 전통과 변화를 잇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이상으로 과거의 5월 19일 이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